벤처업계 5년차 첫 회고록
창업 2년과 M&A, VC 2년과 IPO를 얕게 경험한 뒤 내린 14가지 생각
- 자본은 흐른다
자본은 유속에 차이가 있더라도 결국 흐른다. 특정 지점에서 경화가 발생하더라도 한편에서는 분명 흐른다. 어느 기관은 펀드를 결성하고 어느 법인은 투자를 유치한다. 조폐는 이루어지고 채권은 발행되며 누군가는 결국 소비를 한다. 자금을 조달한다는 것은 흐름의 한 영역에서 물길을 트는 것이지 흐름을 거스르거나 방향을 바꾸는 것이 아니다. 완전한 정지란 없는 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하고자 한다면 기존의 논리를 존중해야한다. 이미 정합하여 현상으로 존재하는 논리를 본인이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하였다고 구조나 상황 탓을 하는 것은 궤변이다. 필요에따라 언제든 흐름을 내것으로 가져올 수 있는 역량이 중요하다.
- 투자는 알 수 없다
투자는 모른다. 투자에 정답이 있으면 모두가 부자가 되었겠지. 구조적으로 그럴 수 없다. 이에 결국 중요한 것은 투자 의사 결정을 내리는 그 시점에서의 최선의 확신이다. 손해를 보든 천재지변으로 아예 그 기업이 패가망신을 하든, 다시 투자의사 결정의 시점을 회상했을 때에도 결국 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라 확신할 수 있어야한다. 비즈니스를 위한 상투적 표현을 제외하고 '잘 모르겠지만 투자했어/드랍하긴 했지만 잘 모르겠어'라고 말하는 것이 싫다. 어차피 그 누구도 모른다. 허나 이에 동조하는 것은 투자자로서의 태만이다. 그러니 투자의사를 결정한 나의 이유에 대해서는 내가 가장 잘 알아야한다.
- 벤처캐피탈은 양방향 비즈니스
벤처캐피탈은 투자만 하는 업이 아니다. 좋은 기업을 발굴하여 심사하고 밸류업 하는 것도 너무나 중요하지만 우리에게는 출자자라는 또 하나의 거대한 고객이 존재한다. 좋은 기업을 자금으로 지원하기 위해서는 펀드를 결성해야하며, 해당 펀드에는 하우스만의 철학과 시장에 대한 이해를 담아 잠재고객에게 최선을 다해 세일즈해야한다. 그리고 우리를 믿어준 고객에게는 반드시 높은 수익률로 보답해야할 당위가 있다. 그것이 고객가치를 제고하는 좋은 기업으로서의 벤처캐피탈이다. 좋은 기업으로 장착한 벤처캐피탈은 우리의 또 다른 고객, 즉 창업자에게 더 좋은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으며 이는 우리의 해자 내지 플라이휠이 될 것이다.
- 비상장 밸류에이션의 의미
성공한 비상장기업을 의미하는 유니콘은 기업가치가 1조원 이상으로 평가되는 기업을 의미한다. 허나 비상장기업의 유동성은 매우 낮으며 해당 기업가치는 시장에서평가를 받았다기 보다는 기업가치가 찍힌 쪽에 가깝다. 또한 해당 기업가치에 누군가는 주식을 매입했다는 뜻이고 이들은 한번 더 다른 누군가에 의해 기업가치가 높게 찍혀질 것 혹은 시장에서 그 이상으로 평가받을 것을 기대하여 투자했을 것이다. 허나 대기업 그룹사를 제외한 벤처기업이 조단위 이상으로 국내시장에 상장하기는 어렵다. 특히 상장심사 과정에서 느낀 것은 기업을 평가하는 관점이 상당히 다르다는 것이다. 비상장투자는 여전히 성장성과 혁신성, 파괴력을 지지한다. 허나 상장의 문턱을 통과한다는것은-물론 놓치기도 하는 것 같다만- 기업의 안정성과 투명성, 계속성이 보장됨을 의미한다. 유니콘 벤처투자 논리와 상장 심사 통과의 논리는 그 시차에 비해 너무나 불연속적이다. 결국 유니콘 데카콘 기업의 다음은 무엇인가. 글로벌 VC/PE가 찍어줄 것인가 나스닥이 평가할 것인가. 혹은 이런 고민은 필요없는것인가. 결국 투자자는 그저 다음 모멘텀에 누군가에게 보유주식을 매도하고, 기업은 더 높게 찍힌 기업가치를 홍보하며 도무지 끝을 알 수 없는 '성장'을 계속하기만 하면 되는 것인가.
- 시장상황과 기술진화의 괴리
친구의 표현을 따라, AI 기술 발전은 아무리 보수적으로 생각하려해도 도무지 회의론을 가질 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 빠르다. 인프라를 활용하여 만들 수 있는 서비스는 무궁무진하고 오히려 기술의 발전이 너무나 빠르기에 얼리어답터 서비스는 인프라에 사장될 것을 두려워해야하는 수준이다. 자본 흐름의 곳곳에는 경화가 발생했음에도 물길은 이 섹터로 모이고있다. 그리고 초기 스타트업의 기업가치는 성장성을 기반으로 평가받되 투자 수요에 따라 결정되는 정성적 측면을 보이기에, AI 스타트업의 밸류에이션은 타 업종에 비해 너무나 높게 형성되어있다. 혁신을 견인하는 것은 기술과 인력과 자본이며 혁신의 정착에는 정책과 대중이 있다. 매크로와의 괴리로 인해 자본이 비대해지는 것 같은 우려는 분명 존재하나 결국 혁신이 발생하여 정착할 것에는 의심이 없다.
- 밤샘의 자해적 성격
밤샘의 고통은 묘하게 통쾌하다. 하지만 밤을 새고 일을 많이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아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그저 현상일 뿐. 불확실과 어려움을 해결이 아니라 해소하기 위해 구현하는 '몸을 해칠 정도로 열심히 하는 나'를 경계하라.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온갖 지리한 수단 중 밤을 새고 스스로를 해하는 것은 가장 쉬운 방법임을. 그리고 그것은 자체로 전혀 가치가 없음을 반드시 인지해야한다. 문제가 있으면 해결해야한다. 일이 있으면 마무리해야한다. 이러한 과정을 위해 병행된 밤샘은 자랑스럽거나 통쾌할 이유가 조금도 없다. 만약 그런 마음이 들었다면 내가 해결한 문제가 사실 너무나 쉬운 것이라 결과보다 과정이 뿌듯했던 것이 아닌지 돌아보면 된다.
- 바이럴 현상 자체의 유행 - 제품의 숏폼화
내가 창업했던 시기-유동성이 폭발하던 시기-에는 린스타트업과 mvp 방법론이 진리처럼 받아들여졌다. 제품 런칭 전 mvp를 공개해야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하지만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여진 나머지 mvp 는 핵심 가설 검증을 위한 프로덕트가 아니라 그냥 미완성 프로덕트의 형태로 시장에 마구 공급되었다. 요즘 피프티피프티, GAS, AI프로필 등이 견인하는 바이럴의 유행도 비슷해보인다. 물론 상기한 제품들의 바이럴 효과가 대단했음에는 이견이 없다. 다만 바이럴의 특성인 단기간의 성과와 지표에서 공급되는 도파민, 즉 성취의 가성비가 시야를 흐리는 것 같다는 우려는 지울 수 없다. 마치 제품 자체가 숏폼화가 되는 기분. 일단 바이럴을 일으키고 리텐션을 고민하는게 맞는가. 고객에게 제안하고싶은 핵심 가치는 무엇이며 비전과 미션은 대체 무엇인가. 바이럴은 적재적소에 쓰여야하는 '수단'이다. 제로투원을 만들지 못했는데 텐엑스가 무슨 소용인가 싶은 것이다.
- 기업의 구성요소는 제품과 재무와 주가와 직원이다
좋은 기업은 제품이 제공하는 유저경험과, 재무제표에 확정되는 영업이익과, 기업의 주식에 대한 주주가치와, 임직원에 대한 적절한 인센티브를 제고하는데에 모두 탁월해야한다. 그 중 가장 외면되기 쉬운 요소는 투자금 납입 이후의 주주가치기에 종종 아쉬운 마음이 남는다. 고객에게도, 법인에게도, 주주에게도, 임직원에게도 모두 더할나위 없는 기업을 만들고싶다.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 두 유형의 바보들
남을 폄하하는 표현은 최대한 자제하건만 일을 하면서 만나는 견디기 힘든 두 유형이 있다. 먼저 창업가로부터 갑이라고 생각하는 VC, 그리고 VC를 멍청하다고 생각하는 창업가. 이들을 간단하게 변증해보자. 먼저 벤처투자의 시장은 매우 좁고 정보의 확산이 빠르다. 경제학에서 전제하는 합리적 상황과 꽤 닮아있다. 즉 이러한 상황에서 좋은 기업에는 VC가 몰린다. 텀싯을 내민다. 창업가는 그 중 투자사를 선택한다. 납입기한, 심사역과의 핏, 후속투자여부 등 본인만의 기준을 통해서 말이다. 본인이 창업가에게 갑이라고 느껴진다면 혹시 좋은 투자를 못하고 있는것이 아닌지, 정보의 흐름을 놓치는 것이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두번째의 경우를 보자. 분야전문성이라는 것은 좋은 무기이다. 허나 그 무기를 심사역에게 세우는건 어리석다. 결국 펀드수익률을 높일 의무가 있는 VC는 본인만의 강점분야 소수를 포함하여 다방면의 분야를 학습하며 동시에 시장의 흐름을 고려한다. 당연히 특정 분야의 창업가와 해당 분야에 대해 지식 격차가 있을 수 밖에 없다. 다만 투자자로서의 통찰이 있는 것이고 이를 기반으로 투자 여부를 결정, 즉 드랍하는 것이다. 본인을 알아보지 못하는 VC가 멍청하다고 생각하는 창업가라면 이를 고려해보는것이 좋겠다. 창업가가 VC보다 분야전문성이 못하다면 그도 그대로 심각한 문제이다.
- 평가는 결국 시간이 지나서 이루어지는것
벤처투자의 어려움은 당시 나의 판단의 옳고 그름에 대한 여부가 밝혀지까지 너무나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것이다. 스스로에 대한 피드백을 하기가 쉽지 않다. 시차는 두려움을 만들기도 하고 뜻밖의 선물을 주기도 한다. 다 지나가고 나서 그럴 줄 알았어 라고 손가락질하는건 누구나 할 수 있다. 요즘은 그런 생각을 많이 한다. 지금 내가 코로나를 맞이했으면 어땠을까. o2o 서비스 혹은 이커머스를 창업해서 의도된 적자를 표방하며 기업가치를 높이다가 현재 허덕이게 되지 않았을지. 혹은 21년 하반기 웹3을 맞이했다면. 주가보다 토큰가치에 집중하여 펀더멘탈을 잃은 트레이더형 창업가가 되지는 않았을런지. 그러면 지금은 무엇을 보지 못하고 있는것인가. 창업했다가 물리기 딱 좋은 2-3년 단위의 시장 변화에서 현명함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내가 진정 만들고자 하는 가치는 무엇인가.
- 선의와 겸양의 우월전략
상황은 언제든 바뀐다. 아무것도 모르고 했던 첫 창업에서 우리에게 시드투자를 제안한 VC가 마치 신처럼 보였건만 어쩌다보니 VC에 입사한지 2년이 넘어가고 있다. 매번 스타트업의 IR을 듣고 심사하던 입장에서 직접 우리 회사의 IPO IR을 준비했다. 1세대 벤처캐피탈리스트이자 투자업계의 구루인 우리 대표님은 내 또래의 주니어 애널리스트 앞에서 IR을 했다. 이전 펀드의 이해관계자로서 우리에게 부탁을 드리는 입장이었던 담당자가 거래소 심사역으로서 우리의 상장여부를 결정했다. 복잡계에서는 100% 예측가능한 상황은 없다. 그 안에서 늘 선의를 앞세우고 스스로에게 가장 높은 잣대를 세움으로써 자연스러운 겸양을 보이는 것은 무조건 우월전략이 된다. 마냥 합리적이고 필요할 때 언성을 높일 줄 아는 것이 어른이라 생각했던 적도 있다. 허나 합리가 당연하고 언성을 높일 필요 따위야 매번 발생하는 사회에서는 그 어떤 피로감에도 불구하고 항상 선의를 앞세우고 다정을 베푸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임을, 동시에 가장 우월전략임을 안다. 이에 늘 지향하고 싶은 바이며 이러한 덕을 갖춘 사람을 나는 가장 높게 평가하곤 한다.
- 반드시 갖추어야할 두 가지 모순적 덕성 - 극도의 유연함과 의연함
삶에는 불확실성이 산재한다. 절대 생각한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의도는 곡해되고 납득할 수 없는 비합리를 마주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비즈니스를 하고자 한다면 유연함과 의연함이라는 모순되는 요소를 모두 갖추어야한다. 그것도 극단적으로. 나에게 극도의 유연함이란 갑자기 뺨을 맞아도 침착하게 대응할 수 있는 태도이고, 극도의 의연함이란 100억을 벌어도 초연할 수 있는 자세이다. 밖으로는 유연하고 안으로는 의연할 것.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안티프래질의 정의이며 이 역시 위와같이 한평생 고도화하고싶은 덕이다.
- 돌이킬 수 없다고 느끼는 그 어느것들도 사실 언제든 그만둘 수 있음을
관성은 거스르기 어렵다. 비가역적인 문제들은 그저 디폴트로 치부하고 이에 대한 임시방편 혹은 궁여지책을 고민하는 것이 더 쉽다. 허나 이것들이 정말 큰 문제로 이어지기 전 그만두거나 변화시킬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시기는 현재뿐이다. 사업에서도, 인생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만두기에는 너무 멀리 왔다고 느껴지더라도 사실 언제든 그만둘 수 있음을. 그리고 그 시기는 늘 현재가 가장 최적임을. 그렇지 않으면 언젠가 발생할 문제를 유예하는 것일 뿐. 매몰비용에 대한 확실한 냉철함이 필요하다.
- 확신할 수 있는것은 아무것도 없다
늘 틀릴 수 있음을 염두하기에 나는 스스로 무언가를 확언하거나 남의 오류를 지적하는 일을 꺼려한다. 앞선 회고들 또한 단지 현재 시점에서 제한된 정보들을 기반으로 판단하여 글로 정제할 수 있는 생각일 뿐이다. 5년 뒤에는 얼마나 틀려있을지 기대가 된다. 그러니 이견도 첨언도 반박도 비판도 나아가 비난도 환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