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사를 졸업하며
등록학기 10학기, 일반휴학 3학기를 가까스로 마치고 드디어 문학사의 자격을 갖추었습니다. 지지부진한 시간이었고 내세우기 애매한 학점이지만 이는 제가 저의 학문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님을, 저와 조금이라도 교류했던 분들이라면 모두 알고있을텝니다.
아쉽습니다. 소속이나 환경의 급격한 변화에서 으레 마주하는 회한 같은 것은 아닙니다. 새로운 도전에 대한 설렘 섞인 두려움도, 지난 과정을 돌아보며 느끼는 덧없음도 아닙니다. 그저 대학이라는 공간에서 인문학을 공부할 날이 앞으로 다시 없음을 알기에. 난해한 형이상학적 고전을 이해하기 위해 토론하고, 문학이 포착하는 시대의 정신을 읽어내며 역사를 맥락으로 다루고, 부조리한 세계에 피투된 불완전한 자기존재를 납득하고자 사유하고, 사유에서 발생하는 고통을 해소하기 위해 더더욱 사유하던 그 '대학생활' 을 모두 마쳤음을. 그렇게 끝이라는 단절, 다시없을 무언가에 대한 상실, 알면서도 놓아보내야하는 순간에서 오는 깊은 아쉬움입니다. 이제 한평생 효용과 자본을 창출하는 직과 업에 충실할 것이 명백합니다. 든 일에 인문학적 소양이 필요하다는 말은 제발 하지 말아주세요. 그것은 정말 저를 슬프게 만드는 말입니다.
그러니 아쉬운 마음에 적어봅니다. 제가 어느 마음으로 대학에서 이 학문을 대하였는지, 또 학사 자격을 갖추며 어떤 배움을 갖게 되었는지 지금이 아니면 글로 정제할 시간이 없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무상함을 배웠습니다. 삶은 영원히 흐를 억겁의 시간에서 너무나도 찰나임을, 존재는 끝을 알 수 없는 무한한 우주 속의 미립자임을 이해했습니다. 자유의지도, 그 어떤 참신한 발상도, 단장지애의 고통도 특별할 것이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진자의 추는 좌우로 운동하고 문명은 발흉과 쇠멸을 반복합니다. 별이 정해진 궤도를 순회하듯 인간도 그저 생애주기를 삽니다. 거대한 무상함의 근원을 밝히는 일에는 모든 철학자가 실패했습니다. 그러니 저도 그저 이를 납득할 뿐입니다.
인간을 배웠습니다. 시공간과 다르게 인류사는 유한합니다. 시작이 있고 언젠가는 절멸의 끝도 마주합니다. 한정된 정의역에서는 본질을 도출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인간은 우연하게 지적 능력을 부여받은 덕에 문자를 만들었고 유리와 돌 위에 역사를 쓰다못해 인쇄술마저 발명하지 않았습니까. 켜켜하게 쌓인 삶의 수레바퀴는 덕분에 궤적을 남길 수 있었고 저는 이를 읽으며 인간의 본성을 배웠습니다. 이는 시대의 변화에 침식되거나 세월의 흐름에 따라 퇴색되는 류가 아닌 불변의 요소입니다.
저를 배웠습니다. 부조리한 삶의 무상함과 가변성, 불가지 하에 존재를 의심하고 또 의심하며 스스로에 대한 깊은 이해를 구축했습니다. 많은 실수와 헛짓거리를 벌였고 후회가 남지 않는다면 거짓말일 행동들도 선명합니다. 그렇게 자신은 존재만으로 특별할 수 없으며 선인이 되지 못할 위인임을, 그저 범인이자 중생임을 깨달았습니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사로운 감정보다는 늘 선의와 친절을 앞세울 수 있는 태도, 쉽게 식지않는 활력과 긍정, 모든 일을 사랑하는 스스로를 지지해줄 적당한 지성을 갖추었음도 압니다. 현실적인 성취가 아닌 다른 무언가를 추구하는 낭만주의자로서 나만의 삶의목적을 만들어야한다는 것 또한 저에대한 깊은 깨달음입니다.
어차피 한치앞을 알 수 없는 부조리한 세상입니다. 안정성이나 부유한 삶에는 하등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니 졸업 후의 저는 늘 새로운 도전과 개척의 파도에 휩쓸리는 삶을 살기로 선택하였습니다. 와중에 인간과 나에 대한 이해는 필요한 순간에 적절한 닻이 되어줄 것이라 믿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유한하고 무상한 삶에서 늘 방향성을 제시해 줄 수 있는 나침반의 비용이 7년간의 학부생활이라면, 꽤 괜찮았던 거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