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의 산, 여정의 끝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한없이 무용한 질문에 골몰해온 인간 역사는 유구하다. 결국 부패할 육체의 운명에 갇힌 채 절대적으로 선형적인 시간을 살아야 하니까. 심지어 그 짧고 유약한 생애 하에서도 인간은 늘 압도적인 자연력을 마주하며 죽음을 고민해야했다.
단절된 공간이 부여하는 시간의 특수성 하에 죽음을 가장 가까이 마주하는 마의 산에서는 이러한 본질적인 고민들이 정수를 이루며 산재한다. 주인공 한스 카스토르프의 '위의 생활'을 서지와 활자의 형태로 엿볼 수 있어 행운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상당한 고난이었던, 천 사백페이지 가량의 마의 산 여정을 드디어 마무리하고 기행록을 적어본다.
1.
시간이란 절대적이고, 선형적이며, 공평하다. 그리고 죽어간다는 것은 인식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그렇게 죽음 전까지 인간에게 주어진 시간의 총량은 결과적으로 정해져있다만 애석하게도 시간의 본질적인 속성과 달리 개별 인간은 너무나도 상대적으로 시간을 인식한다. 경험적으로 다들 알테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의 채도를 높이고자 생산적인 무언가들을 우겨넣다보면 어느순간 시간의 뭉텅이가 훌쩍 날아가 결국 하나의 기간, 다시말해 다시 없을 특정 '시기'를 너무나도 빠르게 흘려보내게 된다는 것을. 역설적이게도 그저 아무것도 하지않고 자신의 숨과 맥박을 세며 시간을 흐름을 느끼는 것이 주어진 한정시간을 가장 선명하게 붙잡는 방법같기도 하다. 물론 그렇게 길다랗게 잡아낸 시간은 돌이켜보는 순간 실체의 공백으로 급격하게 오그라들어 소모적이라는 감상만 남기 마련이지만 말이다. 마의 산에서의 시간 또한 그렇다. 비일상적이고 끝이 정해진 체험에 불과했던 일주일은 도서의 1/3을 차지하며 유난하지만 위의 생활, 그리고 위에서의 수평생활에 일상적으로 익숙해진 카스토르프는 나머지 2/3을 통해 마의산에서 총 7년을 머무른다. 그 시간은 일부 선명하고, 일부 지리하다. 카스토르프가 인식하는 그 흐름과 작가의 직접 시간을 다루는 솜씨는 중층을 이루며 이는 고전으로서의 마의 산을 탐독하는데에 핵심이 된다.
마의 산이란 알프스 산맥에 고립되어 위치하는 20세기 초반의 결핵환자 요양원이다. 즉 마의 산이라는 공간에 내재하는, 그리고 천 사백페이지 내내 독자가 함께해야하는 핵심요소는 질병이다. 모든 사람은 병에 걸렸다. 밤마다 죽음과 같은 기침을 뱉으며 각혈한다. 일부 기흉환자는 옆구리로 기묘한 소리를 낸다. 다들 열이 오른다. 열에 시달린다. 고전적인 체온계를 꾹 물고있는다. 체온계를 물고있는 7분이라는 시간은 선명하다. 고열은 체온계로 증명된다. 증명된 열은 오히려 고양감을 준다. 고열에서 창발된 고양감은 판단력을 흐린다. 새로운 체험을 하게 만든다. 무언가 향락적인 상태에 놓이게 만들면서 말이다. 마의 산에서의 생활은 대개 이런식이다.
병에 걸린다는 것. 앓는다는 것은 건강한 상태에서 무언가 어긋남을 의미한다. 죽음과 약간이나마 가까워지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철학적 쟁점이 등장한다. 우리는 질병을 긍정해야하는가. 그러니까 삶과 죽음도 모르면서. 그 애매한 질병이라는 상태를 인간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질병이 죽음과 가깝다는것은 애초에 참인가. 열은 생명력의 근원 아닌가. 아니라면 병에 걸려 누워있는 것은 그저 방종인가. 과연 정신과 육체는 일원인가. 그렇다면 방금에 대한 답이 유물과 관념에 대한 당신의 직관과도 정합한가.
이에 대해서는 마의 산 통독의 가장 큰 장벽이라고도 일컬어지는, 두 현학자의 일장연설을 통해 굳이 부연설명을 덧붙이지 않아도 심도있는 정과 반의 토론으로 파악할 수 있으니 갈음하려 한다. 이 뿐만아니라 마의 산에서 던지는 수많은 본질적인 고민들은 세템브리니와 나프타의 언쟁으로 다루어진다. 온갖 쟁점에 대한 기상천외한 주장들이 탄탄한 나름의 근거로 쏟아지는걸 보면 꽤 흥미롭다. 사실 더욱 흥미로운건 이 두 교육자의 속성이다. 인문주의를 표방하며 시민의 자유와 계몽을 외치는 세템브리니는 프리메이슨 당원이며, 태생적으로 악의에 가득 찬 채 고문과 사형을 긍정하는 테러옹호자 나프타는 예수회 회원이다. 속성과 마찬가지로 주장들도 이런식이다. 각개로 보면 정연하지만 둘을 논쟁으로 붙이는 순간 꼬리를 물며 순환에 빠지는 모순 논리를 계속해서 지켜보노라면 간절하게 합을 도출하고 싶어질테다. 재밌는건 작가가 이성주의 철학사조를 철저히 부정하는 것인지, 소설의 -심지어-후반부에 어마어마한 디오니소스적 인물을 등장시킴으로써 이 둘을 아주 초라하게 전락시킨다는 것이다. 페퍼코른은 말을 더듬고, 기묘한 제스처를 행하고, 늘 취해있으며, 당연하게도 병에걸린 거인이다. 마치 이교도의 사제처럼 춤을 추는 이 '왕 같은 자'는 소설 내내 입지를 공고히했던 두 아폴론을 그 존재만으로 압도, 묵살해버린다.
세상의 많은 요소들은 정과 반으로 설명되지만 마의 산에서는 결국 이를 회의나 염세, 나아가 순수한 비이성으로 허무하게 만든다. 나프타와 세템브리니와 페퍼코른 뿐만이 아니다. 삶과 죽음과 철학적 부활, 사실 계몽보다는 낭만과 닮아있는 자유, 묘하게 통쾌한 불명예의 특전, 영원과 신비를 규명하는 수단으로써의 우주개벽론 대 점성술의 타당성 비교 등.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의 산을 관통하는 확고한 주제의식은 분명하게 존재한다. 마의 산 작가 토마스 만은 진심으로 강력하게 하나의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수많은 철학적 쟁점과 진리물음들을 스러지게 만들어놓고서는 말이다. 그것은 바로 연민과 사랑이다.
애초에 카스토르프의 감정이 묘사되는 부분 자체가 거의 없거니와 전반적으로 음산한 기조하에 철학에 대한 냉철한 고민이 주를 이루는 소설이지만, 카스토르프의 강렬하고 격한 감정상태가 느껴지는 특정 대목은 작가의 주제의식에 대한 증거를 찾는 재미를 준다. 벌레먹은, 키르기스인의 눈을 가진 클라브디아 쇼샤를 향해 느끼는 아득한 연정의 감정과 선량한 군인 요아힘의 죽음에 대해 이루 말할 수 없이 솟구치는 인간적인 애수가 그렇다. 허나 토마스 만의 사랑에 대한 강력한 주장은 모든 것을 차치하고 마의 산의 절정이라고 칭해지는 '눈' 챕터에서 그 어떤 은유와 허울뿐인 상징을 모두 벗겨낸 채 전방면에 드러난다. 압도적 자연력 앞에서 역설적이면서도 본능적인 용맹함을 발휘하다가 결국 설산에서 조난을 당한 카스토르프가 삶과 죽음, 시간과 비시간성의 경계에서 발견한 가장 원초적인 깨달음이다. 해당 내용은 직접인용을 통해 메시지를 해치는 부연설명의 위험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사랑은 죽음에 대립하며, 이성이 아니라 사랑만이 죽음보다 더 강한 것이다. 이성이 아니라 사랑만이 선량한 생각을 갖게 한다. (중략) 인간은 선과 사랑을 위해 결코 죽음에게 자기 사고의 지배권을 내어 주어서는 안된다.
결국 다시 돌아와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한없이 무용한 질문에 수 세기를 걸쳐 골몰해왔지만 여전히 정답은 없다. 운명은 바뀌지 않았지만 인류는 자연력에 대항하기 시작했다. 삶과 죽음을 고민하자니 오감의 쾌락을 충족해주는 수단들이 너무나 많아졌다. 그러니 여전히 무용한 질문따위에 괴로워하는 작자들이라면 마의 산 여정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죽음과 육체의 방종에서 사랑의 꿈이 생겨나는 '위의 생활'을 체험해보시길. 그동안 인식하지도 못했던 스스로의 단순성이 간접적인 모험으로도 충분히 고양되어 그 질문에 대한 나름의 답을 정제할 수 있을테니 말이다.
온 세상을 뒤덮는 죽음의 축제에서도, 사방에서 비 내리는 저녁 하늘을 불태우는 열병과도 같은 사악한 불길 속에서도, 언젠가 사랑이 샘솟는 날이 올 것인가.
p.s.
마의 산은 너무나도 뛰어나다. 이 대단한 고전을 일상에서 소화하느라 괜히 분주했다. 그러다보니 종종 주변 사람들에게 마의 산은 어떤 책이냐는 질문을 받는 곤란한 상황에 처하곤 했다. 그에 답변하다가는 마의 산이 나에게 선사해준 가치에 비해 나의 언어능력이 여전히 미약하여, 이런저런 설명을 덧붙이다가 오히려 장황하고 형이상학적인 궤변을 늘어놓게 될 것만 같았다. 그래서 그저 취미로 소화하는 고전 중 하나라고 짧게 말할 뿐이었다. 그러나 완독 후에는 짧은 말로 갈음하는 것을 견딜 수 없었다. 역자의 말마따나 마의 산은 인간이 이런 작품을 쓸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대단하기에 나는 그를 능가할 수도 추종할 수도 없고 오로지 비판할 수만 있다. 그리하여 여전히 너무나도 얕고 불만족스러운 감상이지만, 정성이라도 들여 적어보았다. 나에게 마의 산은 이런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