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굴레에서
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는 달과 6펜스를 꽤 좋아한다. 대중적 문체, 위트와 독설, 속도감있는 사건들의 연속, 배경의 적절한 전환, 폴 고갱과 타히티라는 도발적 소재, 속세의 논리와 범인의 시각으로는 감히 이해할 수 없는 천재의 삶, 대개 불행을 넘어 비극에 가까운 그의 생활 양상, 주변인들의 자발적인 파멸, 이를 지켜보는 중립적이고 담백하지만 제법 강인한 서술자, 그리고 모든것을 포괄해내어 매번 절로 감탄을 자아내게 하는 작품의 낭만적인 제목까지. 스물한살 때 처음 접한 뒤로 여러 차례 다시 읽었지만 늘 만족하는 드문 책이다. 1천페이지가 넘지 않는 책에 대해서라면 묘하게 경시하는 나쁜 기질이 있음에도 말이다.
인문학 수업을 거의 듣지 않게 된 시점부터 해가 바뀌는 연초마다 1천페이지 이상의 문학작품을 읽는 삶을 유지하고 있다. 안나 카레니나, 마의 산, 삼체가 있었고 올해는 고민하다가 서머싯 몸에 대한 애정으로 인간의 굴레에서를 골랐다. 달과 6펜스를 처음 읽은 뒤 홀린듯이 추가 구매한 서적이라 서재의 한켠을 꽤 오랜기간 차지하고 있던 작품이기도 하다. 언젠가는 읽어야지 생각했던 방대한 책을 단숨에 소화하는 것은 늘 즐거운 일이다.
인간의 굴레에서. 스피노자 윤리학에서 따온 범용적 제목의 자전적 장편소설이자 교양소설이다. 이 한문장으로 작품의 성질을 명료하게 정리할 수 있다. 무난하고, 잘 쓰였고, 잘 읽히고, 조금은 실망스러웠다는 뜻이다. 작가 본인이 깊게 투영된 케어리라는 인물의 유년기부터 청년기까지의 삶이 마치 잘 그려진 한폭의 정물화처럼 묘사되어있다. 모든 미사여구를 덜어낼대로 덜어내어 담백하고 깔끔한 문장의 정렬로 삶의 궤적이 이어진다. 그래서 아쉽다. 이러한 문장이라면 휘몰아치는 사건과 격정, 혹은 인물 내면의 지쳐 나가떨어질 수준의 선문답이 있어야할텐데 그렇지 않다. 꽤 평이하다. 물론 마냥 평안한 것은 아니다. 고통받고 부딪히고 번민하고 성장한다. 허나 이러한 우여곡절과 고뇌라면 차라리 더 화려한 문체를 선보일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등장하는 모든 인물상들도 썩 매력적이지 않다. 아마 지나치게 현실을 담아서 그럴수도 있겠다.
아쉬움과 별개로 꽤 재미있는 책이다. 명료한 문장들은 독자에게 이면과 저의를 해독해야할 의무로부터 자유를 준다. 편안하게 글자만 따라가도 상황과 심정이 납득되며 특히 배경과 현장에 대한 묘사는 워낙 일품이라 생생한 그시대의 런던과 파리를 그려볼 수 있다. 작품은 크게 세가지 굴레를 벗어나는 필립 케어리의 성장으로 이루어진다. 각각의 사건들은 한 개인이 마주하기에는 꽤나 벅차면서 그렇다고 견디지 못할 수준의 절대적인 고난은 아니다. 극복에서 따라오는 성장과 성취 역시 극적이지 않고 적당한 편이다. 그러나 말미의 필립 케어리는 분명 첫 굴레를 끊던 소년기와는 명백히 대조되는, 완연한 성숙을 보여준다.
먼저 탄생과 졸업이다. 필립은 명민한 두뇌와 불구의 다리를 가진 고아로 태어났다. 엄격하고 금욕적이면서 지긋지긋한 성질의 백부와 서툴지만 다정한 백모의 슬하에서 내성적이고 얌전한 아이로 자란다. 사제 집안인 만큼 자연스럽게 신앙학교에 보내진다. 그곳은 갑갑한 굴레로 손발이 꼼짝없이 묶여버린 상태와 다름없다. 압박과 통제는 그의 열등감과 자유의지를 오히려 더욱 신랄하고 선명하게 제련한다. 불구는 그의 역린이 되고 영민함의 저주는 불필요한 상황판단력과 사고력으로 이어져 그를 더욱 고통스럽게 만든다. 동시에 어쩔 수 없는 어린아이의 순진함은 피상적인 외향성과 따뜻한 마음을 가진 또래에게 동경과 집착을 갖게했다. 온 마음을 다해 다음 개학일까지 다리를 낫게 해달라고 기도하던 소년은 어느덧 주변 어른들의 수많은 반대를 무시하고 신앙인의 길을 포기한다.
갑작스럽게 펼쳐진 온전한 자유는 오히려 그동안 마주한적 없던 수많은 선택의 폭으로 인해 새로운 어려움이 된다. 서툴게 회계 업무에 뛰어들었다가 현실의 벽을 이르게 체감한다. 숫자에는 영 재능이 없었던 것이다. 도시에서 만난 여러 양상의 인간들 중 화려한 겉치레와 세치혀를 가진 자를 동경한다. 나이가 많고 치장을 잘하는 과부 여인에게 한껏 반해 처음의 연애와 욕정을 경험한다. 찰나의 감정임을 깨닫는데에는 오래걸리지 않았다. 늘어놓아진 모든 시행착오를 무시하고, 본인이 가진 회화에 대한 재능을 높게평가해 파리에 예술공부를 하러 훌쩍 떠난다.
파리에서의 삶은 마냥 향락적이지도, 예술적이지도 않다. 학원에서 정해진 수업을 듣고 그때그때 평가받는다. 적당한 재주를 가진 그는 역시나 적당한 평가를 받는다. 약간 더 뛰어난 재능을 가진 친한 친구의 화풍을 모방한다. 친구가 그리는 연인의 초상을 함께 따라그린다. 필립보다도 훨씬 못미치는 수준이면서 예술가의 길에 대한 병적인 집착이 있던 가난뱅이 학우는 자살한다. 무리에서 유일하게 예술가의 기질과 재능이 보이던 자는 어느순간 알수없는 현학적인 말을 하다가 무리를 훌쩍 떠나 자신의 길을 개척하러 간다. 필립은 초상을 그리기 위해 잘생긴 스페인 모델을 구했다. 작가를 꿈꾸던 그 청년의 필력은 별볼일없다. 재능없는 예술가의 초상을 그려내며, 필립은 그림을 그만두기로 결심한다. 투영의 과정에서 깨달음이 있었을 것이다.
파리에서의 체류기간동안 늘 술집에서 마주하는 주정뱅이가 있었다. 크론쇼는 아는자가 많고 심미안으로 멋진 비평을 해내며 그럴듯한 시를 지어내는 중년의 한량이다. 필립은 크론쇼를 꽤 좋아했다. 항상 취해있던 그는 필립의 결심을 들었을 때 드물게 깊은 우수에 빠지며 진심을 보였다. 빠르게 스스로의 한계를 인정하고 현실로 돌아갈 수 있는 범인의 현명함. 그렇지 못했던 자의 미래가 자신이기 때문이다. 예술은 인간에게 한없이 잔인한 면이 있다.
돌아가신 친부의 길을 따라 의학 공부를 시작한 필립은 원체 타고난 명석함으로 원활하게 적응해낸다. 또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 견고한 삶의 철학도 직조해냈다. 마음이 원하는 방향을 따르되, 모퉁이 저편에 경찰이 있음을 기억할 것. 동시에 풀지못한 삶의의미에 대한 암호도 있었다. 크론쇼가 건네준 그것이었다. '페르시아의 카페트를 본 적 있는가. 그것이야말로 삶의 의미이다.' 이에 대한 의문을 가진 채 필립은 찻집에서 말드레드를 만난다.
특이한 이름과 깡마른 체구, 아름다운 얼굴을 가진 성미나쁜 그녀는 필립을 끊을 수 없는 정념에 휩싸이게 만들고 그를 이리저리 철저하게 농락하는 굴레가 된다. 감히 극복할 수 없는 진정한 인간의 굴레는 정서의 힘인 것이다. 그동안 쌓아올린 자아와 철학 모두 지위를 잃는다. 형편없는 창녀를 향한 무구한 연정은 그를 무한히 번민하게 한다. 다른 남자와 아이를 낳고 필립이 소개해준 친한 친구에게 사랑에 빠지는 사치스러운 여성은 늘 남을 헐뜯고 불구를 조롱한다. 그러다 자존심이 상하면 그의 그림과 가구, 소박한 삶의 공간을 모두 부수어버리고 가출했다가 알수없는 질환을 진단받을 사람이 없어 다시 그에게 서신을 보내온다. HIV임을 깨닫고도 고된 일에는 흥미가 없어 여전히 밤거리에 나가는 것으로 삶을 전전하는 천박한 그녀이다. 그런 그녀에게 필립은 온 물질과 정신을 쏟았다. 그 어떤 사건에도 감히 끝나지 않던 바다와 같던 마음이 그저 시간이 지나고 또 지나서 마침내 소진되었음을 깨닫고, 그제서야 굴레를 벗어나게 된다.
방황과 잘못된 주식투자로 인해 필립은 말그대로 빈털터리가 된다. 학교를 그만두고 친구를 끊어냈다. 길에서 잠을자고 극단적으로 배를 곯는다. 간신히 판매원으로 일하며 유산을 가진 늙은 백부의 죽음을 기다린다. 신에게 귀의했으면서도 죽음에 대한 공포와 삶에 대한 미련을 놓지 못하는 백부는 끈질기게 명의 줄을 잇는다. 필립은 본인도 모르게 그의 죽음을 바란다. 스스로의 미련함을 원망하고 유산이 돌아오면 살아낼 바람직한 앞날을 철저히 계획하고 상상한다. 끝으로 내몰린 그의 삶은 기른 자의 죽음을 하루하루 기다리며 연명한다. 삶의 줄다리기는 백부의 죽음으로 끝이났고 필립은 다시 정상적인 삶의 궤도에 오른다.
필립은 인기많은 의사이다. 환자의 삶을 이해하고 관찰하기를 좋아하며 거들먹거리지 않는다. 종교, 예술, 사랑의 굴레를 모두 겪어낸 그의 초연함은 처음보는자에게 매력적인 인간성으로 다가온다. 특히 여러 수련의들이 못견디고 질려 그만둔 항구도시의 깐깐한 노의사 닥터 사우스와는 마치 부자지간마냥 지낸다. 기존에 이하선염을 앓고있던 보조의사를 내보낼테니 함께 병원을 운영하자는 그의 파격적인 동업제안은 무겁게 거절한다. 의사라는 직업은 세상을 돌아다니기에 꽤 적절하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미지에 대한 호기심이 강했다. 여행을 다니고 싶어했다. 안달루시아에 펼쳐진 예술의 향연과 페르시아 사마르칸트 현지 장인의 카페트를 목도할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허나 그에게는 학생 시절부터 친밀했던 환자의 가족이 있었다. 그가 생활고를 겪을 때 유일하게 이를 모두 이해하고 며칠간 잠자리를 내어준 따뜻한 가정이다. 여전히 그 가정과는 가깝게 어울리던 중, 소박하고 아름다운 그 집안의 첫째 딸과 연인의 관계로 발전하게 된다. 그렇게 연정을 나눈 밤 이후 샐리에게 찾아온 몸의 변화는 미지를 향한 그의 도전의식을 마모되게 했다. 그저 맞이할 아내에게 그가 가진 모든 드높은 희망을 선물로 주고 싶어지는 마음을 참을 수 없었다. 급하게 닥터 사우스에게 편지를 썼다. 자리를 잡아야했기 때문이다. 답장은 명료했다. '이하선염 멍청이 해고. 언제오는가?' 필립은 모든 사랑스러운 꽃들을 마음에 피워내 만발한 오두막 뜰을 상상하며 샐리에게 청혼한다. 그렇게 작품이 마무리된다.
작품을 다시 곱씹으며 느끼는 아쉬움은 여전하다. 서머싯 몸은 나를 너무나 편안하게, 또 수동적이고 무방비한채 필립의 삶에 온전히 몰입하게 만들었다. 살아있는 격동의 양상들이 아닌 정물같이 제시된 여러 삶의 조각들은 자꾸 아쉬움이 남고 이면과 다음이 궁금해진다. 실제 인물이 대부분 투영되었을테니 아무래도 더 그런 것 같다. 주인공에 대해서는 더더욱 심하다. 단단해진 그가 새로운 도전을 더이어 갔다면 어떠하였을까. 버마의 오지를 탐험하고 신대륙의 꿈과 자유의 중심에 있었다면. 동경하던 오리엔트에 도착하여 그랑드 오달리스크의 영감과 터키탕의 관능을 체험한다면. 그러다 오히려 다시 예술가의 길에대한 미련을 정녕 끊어내지 못하고 다시 가정을 훌쩍두고 떠나 평생 도달하지 못할 진정한 예술의 끝을 처절하게 탐닉했다면.
편안한 자세로 탐독하던 독자인 나는 이기적이게도 작가의 더한 불행과 고난을 바랐던 것이다. 허나 삶이란 페르시아의 카페트 조각과도 같은 것이라, 나는 더이상 그의 삶을 판단할 자격도 이유도 없다. 카페트의 무늬와 양태에 개입하는 것은 오직 직조하는 장인의 심미성 뿐이다. 삶은 개개인의 선택의 연속이며, 어느 자수를 어떠한 복잡성으로 새겨넣어 한편의 경외로운 작품을 엮어낼 것인지는 지극히 가치중립적이다. 각자의 예술이 될 것이다. 그러니 나는 더이상 할말이 없다. 자전적 소설임을 분명하게 밝혔던 작품인 만큼, 서머싯 몸이 그무엇도 더이상 동경하지 않고 부디 진정으로 행복했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