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들
남겨두고 싶은 나의 문단들
191010
그리스 비극은 단순히 통렬한 비참함을 담은 문학이 아니다. 인간을 탐구하며 그 시대정신에 따라 치열하게 서사시를 재해석하려던 노력의 결실이고, 종교적 윤리적 문제의 근간을 다루고 있으며, 고대에 쓰여져 현재까지도 우리에게 인간 본질에 대한 철학적 물음을 던지는 고전이고, 서사문학적 서정문학적 공연예술적 성취를 최고로 끌어올린 종합예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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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을 이끌어가는 주된 힘은 중층의 오염과 카타르시스, 제의적 서사, 영웅들의 자유의지 서사이다. 이 때 인간의 한계를 안고 절대적인 신의 영역에 도전하는 비극의 영웅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귀감이 된다. 신이 내린 벗어날 수 없는 가혹한 운명과 고난에 적극적으로 대결하며 자기파멸도 마다하지 않는 모습은 역설적로 신이 개입할 여지를 주지 않는 자유의지를 역설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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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탁월한 가치는 고난을 겪을 줄 아는 능력에 있고, 동시에 끔찍한 고난을 견뎌낼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것에 있다. 비극을 접한 후 더이상 스핑크스의 문제를 풀어낸 비범함이나 열두과업을 모두 수행한 용맹함 따위로 오이디푸스와 헤라클레스를 동경하지 않는다. 어떠한 방식이 되었든, 삶의 몰락과 좌절 속에서 비겁하게 도망가거나 체념하지 않고 그 모든 고통을 자신의 탓으로 돌려 자기파멸에 이르는 오이디푸스, 최악의 상황을 직면하고도 자신의 의지로 내면적 고통을 끌어안고 사는 헤라클레스. 이들의 참혹한 모습에서 드러나는 고귀함은 우리로부터 연민을 넘어선 숭고의 감정을 이끌어내는, 또 다른 영웅의 요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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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공부의 시작에는 그리스 비극이 있다고 감히 확신한다
191207
특정한 감각의 우연한 재연은 기억 저편의 경험을 선명하게 재현해낸다. 매일 새벽같이 학교에도착해서 주구장창 듣던 방송제 엔딩곡과 강당의 먼지냄새라던가, 예비 고3 시절 대형 강의 3개를 연달아 듣고 친구들과 쏟아져 나오면서 꼭 한번씩 들리던 크리스피 크림 도넛가게의 향기 같은 것들 말이다.
휴학의 이유였던 나홀로 시베리아 횡단여행을 다녀온 지 딱 1년이 되어간다. 당시 최고가를 자랑하던 갤럭시 노트9을 여행 중에는 그렇게 애지중지하게 잘 챙겨놓고 귀국하자마자 설입 야동 앞에서 잃어버린 뒤로 추억을 복습할 여행 사진이 싸그리 날아갔다. -설입 야동 앞에는 cctv가 없다. 다들 알아두자- 귀찮아서 백업 미루던 습관이 이렇게 터질 줄이야. 블라디와 열차에서의 일은 그래도 일기라도 써 두었는데 이르쿠츠크와 알혼섬의 바이칼호수는 그 마저도 없어서 어느 순간부터 마음 한 구석에만 희미하게 남게 되었다. 시간은 하릴없이 흘러가 올 겨울 최저기온이 나날이 갱신되기 시작했고 관악산에서 맞이하는 영하의 칼바람은 불현듯 이르쿠츠크의 순간들과 그 순간의 감정까지도 순식간에 불러 일으켰다.
200410
완벽한 사람은 없다. 종교에 귀의한 성스러운 사람에게도 위선적 면모가 있고 극악무도한 범죄자에게도 부성애는 있다. 순수한 어린아이는 개미를 태우고 잠자리를 죽이며 즐거워한다. 그냥 그런 것이다. 세상은 원래 모순투성이 인간들이 함께 살아가는 것이고, 그러한 인간과 세상을 우리는 인정하면 된다. 전적으로 정의로운 사람과 세상에 대해 기대를 하면 안되고, 아니 할 필요 따위가 없고 그러니 실망할 필요도 없다. 다만 인문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어떻게하면 조금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을 포함하기에, 또 마냥 달관하고 있을 수 없는게 문제다. 모순투성이 세상에 형이상학적 고민을 얹은 존나 답없는 학문이다.
(중략)
어차피 모순을 안고 함께 살 수 밖에 없는 세상이라면 절제와 선의는 더이상 미덕이 아니라 당위의 영역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내재된 모순을 적어도 못본척이라도 하려면, 조금이라도 더 나은 세상을 살고자 한다면 내적으로는 나를 절제하고 외적으로는 무엇보다도 선의를 앞세우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인간다움 아닐까.
211117
글을 쓰는 것은 귀찮다.
부유하는 상념들을 몇 가지의 단어로 엄밀하게 정의내려야 하고 이를 적당한 길이의 문장으로 구성한 뒤 통사적 오류를 점검해야한다.
글을 쓰는 사람들은 왜 이렇게나 귀찮은 행위를 자처하는 것일까
글을 써야만 할 거 같은 느낌을 받는 순간은 사람마다 상이하다.
좁디 좁은 표본이지만 -그럼에도 어디에 내놓아도 자신있게 글쓰기가 취미라고 소개할 수 있는 사람들인- 내 주변 글쟁이들은 주로 글쓰기를 일종의 배설 행위로 삼는다. 배설보다는 승화라는 표현이 보다 고상하지만 내가 느끼기에 단적으로 이들의 행위는 배설이다. 실낱같은 감정과 그저 통상적인 표현의 가장 깊은 곳 까지 분석하도록 개조된 이들에게 글쓰기는 필수불가결한 일종의 덜어내는 행위인 것이다.
220908
터무니없는 상상이지만, 이메일 앞 뒤에 굳이 핵심에 동떨어진 날씨얘기나 건강얘기를 덧붙이는 건 먼 과거 선비들끼리 서신을 주고받던 문화에서부터 온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글을 주고받는 사이라면 무릇 지켜야 할 예의같은 것 말이다.
쓰잘데기없지만 따뜻하다.
비효율적이지만 고상하다.
요즘 나는 교양있는 사람에게라면 더욱 정교한 인사치레를 건네고 싶어, 가볍디 가벼운 의미의 말을 다듬고 또 다듬는다. 내 글을 읽는 사람에게도 마찬가지다. 더더욱 충만하고 낭만적으로 안위를 빌고싶다.
그러니 어쩌다가 나에게 미사여구로 범벅된 소위말하는 오그라드는 인사를 받더라도 부디 기뻐해주길. 당신은 그 함의를 읽어낼 수 있는 사람이라는, 내 선에서 보내는 최고의 존중이니 말이다.
221129
메타인지에 기반하여 논리적으로 정합한 결론을 내리는데에 능하다는 것은 사후정당화와 가능성차단의 위험에 노출된다는 것. 어쩌면 그럴 수 있지 않음에 늘 곤두서야한다. 나의 세계를 의식적으로 한계지을 필요는 없을 뿐더러 그렇게까지 정연하고 평면적인 인간들은 아닐테니말이다.
230210
독서 만세
명상과 클래식음악과 철학적 대화 만세
뜨는해와 종이책, 생화와 피트위스키, 천재들의 무언가, 와일드한 경험, 실없는 농담 모두 만세
230224
하지만 이 모든것의 시작은 어디인가. 게으르고 충동에 약해 스스로와의 약속을 쉽게 저버리던 내가 고리타분함을 예찬하고 늘 피상을 벗어나려 사고기관을 혹사시키게 된 계기에는. 몸가짐을 정돈하고 이른아침을 취하는 삶을 꽤 긴 기간동안 유지할 수 있었던 동력은 또 무엇인가. 그 끝에는 단정하지 못하고, 건들거리고, 피로와 갖은 자극에 찌든 퀭한 낯빛사이 형형한 안광을 보이던 당신이 있었다. 그런 당신을 떠올릴 때 마다 그나마 내가 가장 잘하고 애정하는 것의 가장 깊은 수준까지 침잠하여 탐구하지 않으면 압도적인 당신 앞에서 비추어지는 나의 무지가 발가벗은듯 너무나도 부끄럽고 비참하게 괴로워 스스로를 유지하지 못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불에 델 것 같은 동경으로 잔뜩 헤집어진 마음이 잘못하여 쏟아지지 않도록 움켜쥔 채 폭주하는 사념을 멈출 수 있는 비법서를 마음다해 갈구했다.
230503
늦은 시간 조명을 통해 굳이 밝히는 녹음보다는 검은 숲이 좋다. 발걸음이 빚어낸 오솔길은 싫다. 그게 그럴듯한 이름을 붙여 사람을 끌어모으는 멋진 길목이라면 더더욱 싫다. 쏟아지는 별무리 밑에서 익숙한 모양을 찾아야하는 이유도 하등 모르겠다. 맑은 하늘을 가로지르는 비행운을 볼 바에는 찰나의 뿌연 주홍빛에 지나지않는 흐린 날의 일몰을 구경하는것이 낫다. 이 모든게 극단으로 치닫으면 그저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수록 검은 파도가 점점 가까워지는 현상에 비이성적인 공포를 느끼고, 눈을 어지럽게 하는 태양이 수평선의 끝에 닿아 사그라지는 순간 마치 에우리디케를 잃은 오르페우스처럼 수직의 절벽을 마주했다고 생각하는게 차라리 마음에 닿는 것이다.